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생각하기(숨은 글찾기)

햇발을 보다

 

 

 

 

흰 눈발이 성성하게 날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커피잔을 기울인다.
어둡고 긴 과거의 터널에서 벗어나 마시는 이 한잔은 진하게 내 속을 파고든다.
홀가분함과 생생한 간접체험.

 

지난해 31일 즐겨가는 헌책방 아저씨가 아이들 새해 선물이라며 주신 책 네 권
그 중에 한 권인 박완서의 "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?"를 읽었다.
딸아이 초등학교 5학년 때 함께 읽었던 "그 많은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?"의 후속편.
그 책을 읽고 녀석은 싱아를 먹고 싶어했었다.
싱아..우리 고향에서는 "시금초"라 불렀던 시큼한 풀
녀석에게 먹이고싶다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다시 먹고 싶었다는 말이 옳겠다.
난 그때부터 싱아를 찾기 시작했다.
그렇게 흔하던 풀이 거짓말같이 다 사라졌다니, 이듬해 사월 초파일 불국사 선방 근처에서 발견하고
"와~시금초다!!" 소리 질렀던 한 줄기 꺾어 딸에게 먹이고 나도 먹고.
그 맛은 변함없었다는, 그런데 딸은 오만상 찌푸리며 뱉어내던 그 싱아.
작가에게 싱아는 사라진 유년이지만 결코 잊지 못하는 시큼한 맛이 아닐까 생각했는데
그 후편인 "그 산이.."는 6.25부터 결혼까지 우리민족과 한 개인의 상실의 시대를 그렸다.
"내가 살아낸 세월은 흔하디흔한 개인사에 속할 터이나, 펼쳐 보면 무지막지하게 직조되어 들어온 시대의 씨줄 때문에 내가 원하는 무늬를 짤 수가 없었다..."라는 작가의 말을 보더라도 결코 감당하기 힘들었던 힘없는 백성이 이유없이 겪어야했던 (작가는 그들을 쭉정이라 표현했다)
무지막지한 세월이었다
그러면서 피난 못 간 서울에 남은 쭉정이(작가)가 겪은 일은 차마 밝히기엔 엄청난 치부 아니, 비장에 숨겨둔 큰 상처를
작가 특유의 담담함과 거북스럽지 않은 필체로 생생하게 보여준 작품.
어쩌면 깊은 상처라 도저히 지워지지않은 기억력인지도 모르겠다.
싱아처럼.

 

상실의 시대 이야기를 간접 체험하고
맞이한 이 아침이 눈이 부시다.
어둡고 습한 터널에서 벗어나 만난 강한 빛같이 눈부시다.

어느새 커피가 식어있고 날리던 눈발도 사라지고 햇발이 쫙 퍼져간다.
참 눈부시다.이 아침이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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